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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의 리뷰/도서

주절주절 옮겨적는 과거 필사노트 1.

by KATE613 2020.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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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47p.

살아오면서 나는 단 한 번도 100퍼센트의 엄마를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33.3퍼센트의 엄마가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어떤 경우에도 100퍼센트의 엄마여야만 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진 속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33.3퍼센트의 엄마가 100퍼센트의 나를 안고 어떤 나무 앞에 서 있다.

 

201p.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 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하는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의 경우는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자신의 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선을 그어도 공허하다. 그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는 이유일까.)

 

228p.

나는 네가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네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지훈처럼 나도 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275p.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에 본심에 가 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중략)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을 테니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없었을 테지요.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각고 싶다.

 

<자기앞의 생> -에밀 아자르

69p.

무서워 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93p.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엔 검정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드씨를 바라보았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174p.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게 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윌리엄 포크너

161p.

우리 앞에 어두운 흙탕물이 흐르고 있다. 강은 끊임없이 수많은 소리를 웅얼거린다. 황토빛 수면은 때로 괴물처럼 움푹 파였다가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지고, 순식간에 저 멀리로 나아간다. 조용하고 순간적이고 심오하게 마치 물밑에서 살아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게으른 잠에서 잠시 깨어났다가는 다시 잠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198p.

말이란 전혀 쓸모 없다는 사실도 그때 깨닫게 되었다. 말하려고 하는 내용과 내뱉어진 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캐시가 태어났을 때 모성이라는 말은,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가진 엄마는 그런 단어가 있든 없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공포라는 말도 공포를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하현

나는 상처를 주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모진 말을 못하니까, 짜증은 내도 화는 못내니까, 싸울 줄 모르니까.

하지만 상처는 그렇게 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자주 반듯하고 날카로웠다.

조금 틀어졌다 싶으면 언제든 싹둑 관계를 잘라버렸다.

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 믿었는데 그건 그냥 비겁한 거였다.

(중략)

몇 개의 얼굴을 떠올렸다. 웃는 얼굴로 밀어낸 사람들, 예의바르게 상처 입힌 사람들.

요즘은 싸우고 화해할 줄 아는 사람들이 부럽다. 관계 속에서 비겁해지는 건 너무 쉽고 편한다. 용감해지는 것과 다르게.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하현

입사 후 제일 먼저 깨달았던 건 나는 아직 사람 보는 눈이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면접 때 그토록 인자해 보였던 대표는 전형적인 강약강약 (강한 상대에게 약하고 약한 상대에게 강함) 타입이었다. 그는 말을 함부로 했다. 막내인 내가 듣는 곳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인 부장에게 멍청하다는 소리를 하고,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빽 소리를 질럿다. (내가 당신들 월급 주는 거란 말이야!) 직원들 앞에서 고객 험담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원색적인 비난과 인신공격. 다들 그걸 수당처럼 받아가며 일했따. 날카로운 말이 남긴 아물 틈 없이 곪아 버렸다. (중략)

회사 밖에서 우리는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사소한 장면을 몇 번씩 곱씹으며 하나의 감정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들. 하지만 매일 아침 출근 기록기에 지문을 찍고 나면 자의로, 혹은 타의로 둔해졌다. 그러는 편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았다.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은 조직에서 살아남기 힘드니까.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하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가끔은 오늘의 무언가를 잘라내야 한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 건강하지 못한 관계, 지나친 욕심. 그것들을 잘라내는 소리를 듣는 게 아프거나 힘들지도 모른다. 미련을 잘라내는 일은 원래 그런 거니까.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하현

내가 원했던 건 낯선 공기가 주는 청결함이었다.

그 무렵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지쳐 있었다.

그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그게 너무 싫었지만 나도 종종 그들을 그렇게 대했다.

우리는 직접 보고 들은 만큼만 서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를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착각에 가까웠다.

내가 본 그의 모습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게이른 우리에게 너무도 성가신 일이었으므로.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으며 때로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우리 밖의 너와 나.

그걸 부정한 채로 많은 관계를 지속했다

(중략)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어던 노력 없이도 서로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낯선 상대다.

다음 주면 남이 될 것들로만 꾸려진 세계에서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모든 걸 얕게 바라보고 싶다. 자동차 백미러에 적혀 있는 문구를 반대로 기억하면서.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음.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하현

나의사막

선인장같은 내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들.

그들이 있어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산다.

누군가 예쁘지 않다 말하는 것들을 사랑하며 산다.

온실보다 아름다운 나의 사막. 거기 당신의 이름이 있다.

 

타인의 삶

우리는 더 많은 소설을 읽으며 더 많은 타인이 되어야 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세상은 무수히 많은 주인공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취미와 특기

누군가는 사랑이 제일이라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 말고도 다른 취미가 많았으면 좋겠다. 취미가 되어 버린 사랑에 우리는 너무 쉽게 휘둘리고 흔들리니까. 사랑은 영영 취미가 아닌 특기였으면, 좋아하기 보다는 잘하는 것이었으면.

 

최고의 이불을 찾아서

마음이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좋은 친구와 멋진 이불을 만날 것.

 

익숙한 우리, 낯선 당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가치관이 충돌하는 상황이 잦아진다. 익숙한 우리 속에는 낯선 당신을 발견하는 일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제까지 여기 있었던 당신이 오늘은 저기에. 남은 우리를 계산하는 습관이 생겼다.

 

완전한 타인

각자의 세계에 적용되는 규칙과 상식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도 완전한 타인. 같은 말을 쓴다고 해서 늘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i에게> -김소연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

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 하루에 축복을 보내니.

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

모르는 사건의 증인인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

아직도, 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살아볼수록 인생은 상투적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흔한 일만 일어난다. 자기 자신에게는 대단한 사연일지는 몰라도 세상 전체로 보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한 가지도 없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은희경

쓸쓸한게 꼭 나쁜 것은 아냐. 애써 쓸쓸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기분이 나쁜거지.

 

<인간실격> -디자이 오사무

부끄러운 일이 많은 생애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략)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것은 지나갈 뿐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이른바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된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단지, 모든 것은 지나갈 뿐입니다.


<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47p.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게 관계를 가볍게 만들어 주거든. 누구든 짐을 지는 건 싫어하니까. 연우야, 이건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

 

349p.

뒤따라 자전거에 오르며 생각했었다. 왜 모두가 강해져야 하는 거지. 강해야만 나를 지킬 수 있는 건가. 사실은, 누구라도 타인의 존재를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폭력인지도 모른다.

 

352p.

고독은 숨겨야 하지만 슬픔은 나눌 수 있다. 존중과 배려는 받지만 대신 상대가 줄 마음이 없는 것을 요구 할 수는 없고. 가끔 신민아씨는 신랄하다. 연우야, 너도 나도 세상의 우등생은 못되잖아. . 능력도 별로 없고 돈도 많이 없어. 너도 죽어라 노력해서 뭐가 돼보겠다는 그런 식은 아닌 애고. 우리 둘 다 나약하고 이기적이지. 먼저 그걸 인정하고 난 다음에, 그리고 서로 의지하자구.

 

44-45p.

현석은 턱을 괴었던 팔을 풀고는 반드시 눕는다. 우리 둘 다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노려보고 있다. 그는 내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현석 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 역시 나를 자신 있고 강하게 본다. 하지만 언제나 잘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을 완전히 던지지 않은 것을 강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을 불신하기 때문에 늘 불행에 대한 예상을 하고 그 긴장을 잃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겉으로는 강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실은 나의 가장 비겁한 면이다. 어떤 df에 자기의 전부를 바친다면 그것만으로 그의 삶은 광채를 얻는다. 하지만 나는 내 전부를 바친 일. 그 끝에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파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의 삶까지도 관객처럼 거리 밖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그 사람을 믿지 않을 것이다. 안전조끼를 입고 바다를 수영하는 모험심 없는 사람이 정복의 쾌감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 -은희경

나는 그들에게서 달리기를 하지 않고도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새의 선물> -은희경

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새의 선물> -은희경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약점이 생기고 어리석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애는 결국 내 마음을 끝까지 붙들지 못했다.

 

<새의 선물> -은희경

시험문제를 풀때는 정답을 쓰겠지만 현실에서는 정답을 다른식으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천천히 잊혀져갔다.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일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것 역시 너그러운 세월에 의해 그런대로 익숙해지게 되었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 -김중혁

 우리는 글을 통해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인 척 할 수 있다. 더 현명하거나 세련된 척 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그럴 수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더 나은 사람인 척 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글쓰기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러시안 룰렛> -은희경

어릴 땐 삼십대가 되면 굉장히 늙은 줄 알았어. 이렇게 모르는게 많고 가진게 없을 줄은 몰랐지. 내 인생인데 내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어.


<자유로울 것> -임경선

과거에 아무리 오랜 기간 우정과 추억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현재 내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다져가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계에서도 살아남는다. 


<드래곤라자> -이영도

"선물 받는 것도 좋지만, 선물할 사람이 있다는 건 더 좋은 일이에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받을테니 나에게 선물해요."


<더 로그> -홍성훈

하지만 사람을 언제나 덥썩덥썩 믿어버리는 것은 미끼를 던져주는 족족 다시 물어버리는 붕어와도 같은 짓이다.


<야행>- 편혜영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화가 난 나머지 아들이 사업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실패했다고 생각해버렸다. 부채가 는다고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대체 실패 탓에 부채가 생긴다는 것도 알았다. 실패가 전적으로 아들 탓은 아니었다. 인생에는 잘 살아보려는 노력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고, 착실하고 소박한 노동의 대가로 비루한 생활이 주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그저 오는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스무살> -김연수

불행은 겹쳐서 오는 것이고 연이어 오는 것이니, 불행의 와중에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바라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내게 무해한 사람> 中 단편 아치디에서 中 -최은영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 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 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중략)


한국에서의 직장도 좋았는데 왜 관뒀던거야?

그간 한번도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하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간호사가 있었는데 내가 많이 싫어했거든.

일을 그만 둘 정도로?

뭐가 어땠는데?

그냥 모든게 다. 인간 같지도 않았지.

얼마나.

그녀는 손으로 눈을 다시 비비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일했던 병원은 다른 병원에서 보낸 호스피스 환자들이 많았어. 더는 희망이 없는 환자들. 공부할때부터 나는 그런 환자들이 가장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사실 살 날이 별로 남지 않은 사람들이잖아.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외로워.

그렇지.

근데 그 간호사는 그런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았어. 기계적으로 일을 했지. 손이 빠르고 실수도 거의 하지 않아서 업무평가도 좋게 받았어.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감정적인 요구를 하면 등을 돌려 버렸으니까. 환자들 마음 같은거, 그녀에겐 듣기 싫은 소음이었어.

그런데?

그 사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환자들의 말도 잘 들어주고 좋은 표정도 지으려고 애를 썼지. 그런데 오랜 시간 삼교대로 일을 하고, 그것도 너무 많은 일을. (중략) 어는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블록 하나가 빠진거야. 아주 작은 블록이었는데 그게 빠져버리니까 중요한 부분이 무너진거지. 근데 본인은 자기도 엉망이 된 것도 모르는거야. (중략)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그런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는거야. 그런데 그건 변명이 안되지. 그런 상황에서도 환자의 존엄을 지키는 간호사들이 대부분이니까. 일이 몰릴때가 있어. 한시도 앉지 못하고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해야 하는 때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계속 일을 해. 그런 날 중 하루였어. 거의 백살이 다 된 할머니가 환자로 들어온 거야. 딸은 팔십 먹은 노인인고. 그 노인이 그녀에게 부탁하는 거지. 자기 엄마 욕창에 드레싱 좀 해달라고. 그녀는 짜증이 나. 그리고 생각하지. 왜 노인들은 이렇게 짜증나는 존재들일까. 다른 일들도 많으니까 조금 기다리라고 해. 정신없이 일 해. 할 일이 너무 많아. 노인이 다시 찾아오지. 할머니, 기다리시라고 했잖아요. 네 시간 기다렸어. 노인이 대답해.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우리 엄마가 아파서 울잖아. 기다리세요. 그녀는 차갑게 말해. 급한 일들을 다 끝내고 가서 드레싱을 하지. 손길은 빠르지만 거칠어. 그리고 생각하는 거야. 왜 백 살까지 살아서 모두를 귀찮게 하느냐고. 왜 이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느냐고. 

그녀는 건조하게 말하고 있었다.

상상이 안 되네.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 호흡기를 차고 많이 자야 두 시간밖에 못 자는 환자가 그녀에게 빨리 죽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도 그녀는 그 환자와 감정을 섞지 않아. 환자들 앞에서 그녀는 벽이 돼.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벽. 환자가 죽어도, 배변 주머니와 오줌줄, 주삿바늘을 환자의 몸에서 빼내면서도 환자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해.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팔짱을 꼈다.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그 여자 생각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래 보여서 추측하는 거야?

알지.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서 나를 봤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고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사람이니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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